오래 전 한 사람과 헤어지면서 말했다. "나는 페넬로페가 되지는 않을 거야." 그가 아직 나에게 감정이 있으면서도 자신이 없어서 헤어지는 걸 알기에, 어쩌면 그가 나중에 돌아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페넬로페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고, 헤어지는 날 그가 나를 차로 집에 데려다 줄 때... 내 스스로의 마음을 붙들기 위해 불쑥 그렇게 내뱉었다. 그러나 실은 그후로, 나는 오랫동안 그가 자신의 진심을 찾아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페넬로페가 된 셈이다.
페넬로페의 남편이자 연인 오디세우스에게는 아테네라는 내적 지혜, 신성한 여성성의 인도자가 있다. 그는 밖에서 방황하면서도 늘 그 신적 동반자의 인도를 받는다. 반면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가 부재하는 20년 동안 왕비로 머물며 남편의 빈자리를 채우지만, 아들도 구혼자들도 그녀의 '홀로 있음' 자체를 하나의 정당한 상태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다들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할 결핍으로만 본다. 그녀 곁에는 오디세우스의 아테네 같은 존재가 없다. 그녀는 베를 짜고 풀기를 반복하며,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내야 했다.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그 운명을 '즐긴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홀로 있음을 수용하는 과정이 있다. 수없이 나의 기다림과 원망과 망각의 시도를 짜고 다시 푸는 시간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 미련한 시간들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또한 내 삶에서 지워야 할 시간이 아니라, 내 삶을 채워준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축복이었다고, 나 자신에게 당당하게 그렇게 주장하게 되었다. 어쩌겠나. 그렇게라도 내가 나를 지지해 줘야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디세이>에서 페넬로페가 아들 텔레마코스와 재혼 문제를 두고 다투다, "오디세우스만을 원한다:고 외칠 때, 그녀는 오디세우스에게 집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오디세우스와 물리적으로 함께 있지 않아도 그의 연인으로서 홀로 있는 것이다. 나 역시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 누군가를 온전히 끝까지 사랑하기 위해, 나 자신의 에고를 찢어내고 다시 봉합하고 치유하는 과정을 통해 사랑이나 평생 갈 수 있는 관계에서 내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즉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이제는 옛 사람이 돌아온다고 해도, 그것들을 타협하는 걸 나에게 강요할 수 없다.
그러니 젊은 남편을 떠나보내고 스무 살 아들의 어머니이자 왕 없는 왕비로 살아온 페넬로페는 더 이상 그냥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가 뭘 원하고 뭘 타협하지 않는지 아는 사람이다. 겉모습은 비슷해 보여도 — 혼자 있음, 아무나 만나지 않음 — 그 안의 동력은 완전히 다르다. 하나는 결핍이 만든 정지 상태고, 다른 하나는 자기 인식이 만든 선택이다.
페넬로페-되기란, 그러니까 기다림을 견디는 기술이 아니라 —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홀로 있음을 스스로에게만은 정당한 상태로 승인하는 일이다.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그 승인은 이미 끝나 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가 그녀 안의 신성한 여성성과 남성성을 결혼시켰을 때, 그녀의 오디세우스가 돌아왔다. 그 자신의 여성성(양심, 아테네)와 화해하기 위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