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16. 21:59 삶의 한때

이번 주에 집에 안 쓰는 물건을 짬짬히 정리중이다. 그 중에 잘 안 쓰는 유아용 백팩이 있어서 재활용가게에 보낼까 하다가, 네살짜리 아이가 있는 프랑스 친구 M에게 이거 선물하면 너네 아들이 좋아할까 하고 사진과 문자를 보냈다. 그랬더니, 자기 아이는 사탕이나 장난감을 더 좋아한단다... (사실 이 대답부터 약간 철없다고 생각했지만, 사탕 한 봉지 넣어 보낼 생각이 있었기에 대충 넘기고) 내가 안 그래도 사탕 넣어서 선물할까 싶었다. 한국에선 빈 가방이나 빈 지갑 선물 안 하는 풍습이 있다고 답장을 했다. 그랬는데 뜬금 없이 (헤어져서 서로 소통을 안 하고 일주일에 며칠씩 애만 데려왔다 데려다주는) 애 엄마(한국인인데, 자기를 괴롭게 하는 ex와 내가 계속 친구를 한다고 나와 우정을 정리했다)가 또 안 좋게 반응할 수도 있고... 뭐 이러면서 하소연을 하더니, 자기 ex와 나 사이의 갈등도 풀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얘기를 한다. 자기랑  아니 선물 얘기가 왜 자기 ex 얘기로 튀어? 이 얘기 3년째 들으려니 나도 속 터지고...


얼마 전에도 이 친구 어머니도 계신 자리에서 내가 한국의 이혼문화는 프랑스랑 다르다, 이혼에도 아이를 위해 참고 소통하는 프랑스랑은 다르다, 애 엄마가 당신들과 아이를 매개로 왕래 안 하는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얘기를 했다. 지난 3년간 몇 번을 얘기해도 계속 같은 얘기를 반복하면서, 나 보고 자기 ex랑 화해해서 자기네 소통 도와달라는 얘기다. 


내가 아이 엄마와 상당히 친하게 지내다가, 헤어진 두 사람 사이에서 내 진의가 잘 이해되지 못하고, 그 친구가 우정 정리하자고 했을 때, 당시엔 많이 속상했지만, 지금은 그 심정도 이해는 한다. 그러나 나와 인연 끊은 사람을 되찾아서 다시 친구할 만큼은 아니고, 그저 그녀 마음의 평안을 기원할 뿐이다. 그 친구도 논문이 진척 안 되서 많이 고생이었는데, 이제 마음 정리하고 논문에 진척을 보았다는 소식을 건너건너 전해 듣고 다행이다 싶었고...


올 봄에 명상을 계속하면서, 조금 더 나 자신의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던 참에,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와 화해했고, 그런 만큼 M의 어떤 면모 때문에 그녀가 이 사람과 헤어졌는지, 프랑스 문화를 이해하면서도 완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는 한국 사람으로서, 가부장 사회의 여성으로서, 또 외국에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사는 성인으로서 공감하는 지점들이 있다. 하지만 3년간 설명을 해도 이 고집 센 프랑스 젊은 아빠는 이해를 못하고, 그저 자기네와 대화를 안 한다고 아이엄마 탓을 하고, 한국 문화 탓을 한다. 


나도 이 친구한테 ex의 거부를 그대로 받아들여라, 억지로 소통 시도 말고 가만히 있어 봐라, 혹시 아냐, 나중에 신의 섭리라도 작용해서 아이엄마가 먼저 다가올 수도 있다, 이렇게 얘기를 계속 하지만... 이건 신의 섭리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법적 권리 문제라고 한다. 이런 얘기 3년째 들으면 나도 사회학자로서, 어쩔 수 없구나 생각할 때도 있지만, 모든 일을 순리대로 풀지 못하고 법부터 들고 나오는 이 젊은 친구에 대해서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러나 내 충고를 받아들이든 못 하든 그건 또 이 친구의 몫이다. 내 말 안 듣는다고 화내지 말고, 나도 그대로 받아들이되, 이 얘기 서로 안 하는 게 낫다. 그게 이 우정의 한계이고 현실일 듯.

그래서 어제 결국 문자로 얘기를 했다. 나 지금 논문 쓰는 중이다. 나는 이제 네 ex가 어떻게 사는지 잘 모른다. 이제 나하고 네 ex 얘기하지 말자. 나에게는 과거의 사람일 뿐이고, 나는 그녀와 더 이상 갈등관계에 있지 않다. 거리 둬서 미안하다... 이렇게 답장을 하고 전화기를 꺼놨다. 마음 심란해져서 오후에 글을 쓰기가 힘들었다. 내 일 아니라고 계속 얘기했지만, 내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계속 하면서 내 이해와 동의를 구하는 이 친구에게 화가 났다. 


20대 후반에, 내가 싫어하게 된 대학동기 K가 있었는데, 마침 한 동네 사는 다른 대학동기 J도 그 친구를 싫어해서 가끔씩 K 얘기를 안 좋게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K는 괜히 이삼년에 한 번씩 나한테 연락을 해서 친한 척을 하고, 나는 연락 오는 게 싫은데 그냥 덤덤하게 받는 척하고

(참, 그 전에 내가 술김에 몇 년 쌓인 게 폭발해서, K 멱살을 잡고 나는 너랑 이제 친구 안 한다, 하고 진심으로 절연선언을 했다. 사실 과에선 K가 더 인망이 높아 내가 K에 대한 불만을 얘기할 때, 주변사람들은 그냥 넘어가라는 식이라 더 열받곤 했음)


그런데 나의 절연 선언에도 불구하고 괜히 쓸 데 없이, 지방에 문상을 같이 가자느니, 누구 결혼식에 너도 올 거냐는 식으로 전화나 문자를 보내는 K의 태도를 나는 더 질색하고 K의 단점을 나처럼 볼 줄 아는 J에게 짜증을 내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전처럼 내가 K가 또 연락했다고 짜증을 내니까, J가 K에 대해 더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정색을 하고 얘기를 하는 거다. K가 별로니까, 자기는 더 이상 왕래를 안 하고, 그래서 더이상 K에 대해 나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내 부정적인 얘기가 이제는 피곤하다는 거였다.


그 순간 몹시 당황스럽고 서운하기도 하고 J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감정이 복받쳐서 내가 말을 더듬다가 좀 울었다. 그 이후로 J에게 K에 대해 얘기하는 건 중단했다. 지금 생각하니 J가 옳았다. 나는 K의 연락을 받아줄 의무가 없었고, 그 짜증을 J와 공유하면서 부정적인 감정의 공동전선을 이어갈 필요가 없었다. 솔직하게 얘기한 J에게 감사한다.


나에게 계속해서, 자기와 헤어진 후, 나와도 절연한 자기 ex 얘기를 하는 남사친에게 그녀 얘기 하지 말라고 한 건 옳은 선택이다. 자기도 하면 안 되는 거 알면서, 일단 시작하면 내가 열심히 들어주니까 3년이나 계속함. 이제 그만둘 때가 되었다. 나도, 그도 더 성숙하려면...


사실 내가 이 친구 때문에 어제 받은 스트레스 푸느라고 이 글 앞부분 쓰고 있는데, 어제에 이어 다시 문자가 왔다. 내가 자기 ex에 대해 공감을 하면, 자기랑 내 우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내가 한국 여성으로서, 또 혼자서 프랑스에 사는 사람으로서 그녀에게 어떤 감정이입을 할 수는 있다. 그게 너한테 문제가 된다면, 나로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 나 논문 때문에 바쁘고, 특히 낮에 논문 쓰는데, 자꾸 이런 문제 보내면 거슬린다고 대놓고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알았다고 하더니 (미안하다고는 안 했다) 또 한 시간 후에 무슨 책을 읽어 보라면서 링크를 보내서, 열어 보지도 않고 답장도 안 했다. 

그 친구가 그동안 나한테 의지해 온 게 있기 때문에... 자기 행동을 바로 바꾸진 못할 듯싶다. 그냥 당분간 연락하지 말고, 만나지도 말아야겠다. 뭐 꼭 그 친구를 일부러 멀리한다는 뜻에서라기보단, 내 할 일 많으니 내 할 일 충실히 하고, 그러면 그 친구도 혼자 생각을 해볼 수 있겠지... 여기서 못 멈추고 나한테 계속 자기 ex 얘기하면, 친구 관계 정리할 수밖에 없다... 그런 마음으로 굳세게 대응해야지 하고 결심을 했다.  

posted by amieda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