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26. 06:51 삶의 한때

2010년 말에 한국의 마지막 직장을 그만둘 때, 퇴사 기념 선물로 받은 프린터를 오늘 컴퓨터용품 되살림가게에 기부했다.

 

제품보호 스티커도 안 떼고, 워낙 깨끗하게 써서, 아직도 산 지 1년도 안 된 제품 같은데... 퇴사 한 달 만에 퇴사선물로 받은 프린터를 데리고 프랑스에 온 지가 어느새 8년하고도 8개월이다.
한국시장 전용 출시품이라, 프랑스에서는 카트리지를 구할 수가 없었다. 필드웤 때문에 매년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카트리지를 여러 세트 사와서 쓰다가, 박사과정 2년차쯤, 논문 끝난 한국 사람에게서 30유로에 흑백 레이저를 인도받았다.
5년차에 연구소 근처로 이사해서, 연구실 프린터를 편히 쓰게 되면서, 레이저 프린터는 다른 박사과정 친구에게 논문 잘 쓰라고 넘겨주고, 집에 남긴 데스크젯 프린터였다.

연구소의 공용 연구실보다 다 집에서 혼자 작업하는 습관을 되찾으면서, 연구실에는 인쇄/복사할 때만 간다. 시간 아낄 겸, 이제는 프랑스에서 구하기 쉬워진 정품 카트리지나, 중국에서 만년잉크를 주문해서 그 데스크제을 다시 쓸까 몇 달 고민했는데, 결국 어느 쪽으로도 실행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4년 이상 안 쓴 이 물건과 나는 이미 인연이 끝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 오후 끝물에 벌떡 일어나서 전부터 봐둔 되살림 가게에 데려다 주고 왔다. 그동안 고마웠어. 좋은 새주인 만나.

앞으로 어쩔지 아직 모르겠다. 연구소는 여전히 걸어서 10분거리, 역시 10분거리인 학교 도서관 복합기도 강사 계정으로 돈 안 내고 이용할 수 있고, 소량으로 급한 출력 필요하면 옆방 콜록이 부탁하라고 했고, 논문 진도가 빨라지기 시작해서, 쓰는 대로 인쇄해서 퇴고할 필요가 잦아지면, 와이파이로 연결되는 (좀더 신형의) 중고 복합기를 하나 살까 싶기도 하다.

일단은 프린터가 있던 책장 칸에, 논문 끝날 때까지는 잘 안 볼 예정인 교양서나 철학책들을 꽂았다. 그 덕분에 책장에 자리가 나서, 불안정하게 꽂혀 있던 클리어 파일폴더(주제별로 인쇄된 저널 논문들)과 필드웤 노트들을 좀더 꺼내보기 편하게 정리했다.

하여간, 더 이상 그 깜장 프린터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퇴사 선물로 받은 프린터"를 떠나 보내면서, 그 직장에서 겪은 부정적인 감정들도 더 확실하게 떠나보냈다고 믿어 본다.

posted by amieda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