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5. 06:17 삶의 한때
강의 3년차 만에 왜 남들은 다 성적 잘 주고 자기만 성적을 제대로 안 줬냐는 메일을 받았다. 시험도 보고, 과제도 다 냈는데 왜 과락을 시켰냐는 거다. 20점 만점에 3.9점이니까 10점을 넘겨야 하는 이수 점수에도 한참 모자란다.

중간고사는 망한 건 자기도 알 테고, 수업태도 성실하지 못했고(수업태도 점수 2점 획득 못함), 쪽지과제는 제대로 냈지만, 기말고사 대신 내라고 한 보고서에는 지정된 텍스트 외에 다른 텍스트를 요약해서 냈기에 제출점수로 10% 점수만 줬다.

그래 놓고, 남들은 다 점수 잘 줬는데, 자기 점수만 왜 이러냐고, 만나서 제대로 알려달라고, 성적 발표 2주 후에 연락이 왔다...? 이 친구 이름이 Merveille, 즉 경이로움인데, 자신감이 참 경이롭다.

"나는 원칙대로 처리했다고, 학생이 과제를 제대로 인지하지 않고 엉뚱한 걸 냈으니 학생 책임일세" 하고 무심하게 답장을 할까 하다가, 그래도 신중하자 싶어 친한 강사-박사생 친구 2명에게 물어봤다.

고교교사 경험 있는 브라질 친구(즉 학생은 학생, 선생은 선생이라는 구분에 좀더 익숙함) 페르난다는 우선 내가 아직 청소년 말기인 남자 학생과 둘이 만나는 건 좀 위험하지 않냐고 걱정을 했다. 자기도 작년에 맡은 강의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TA분반들 상위에 있는 대형강의 책임교수가 그러면 보충시험을 보게 해주라고 해서 그렇게 처리한 적이 있다고 답을 해줬다. 나는 그 학생만 과락 점수를 준 게 아닌데, 그 학생만 문제제기를 했다고 보충시험을 보게 되면, 형평성 문제가 생긴다. 역시 절차 부분에선 학년 책임교수에게 물어보는 게 낫다는 임시 결론. 하여간 나중에 어떻게 처리했는지, 서로 자체 '강사 교육' 차원에서 나중에 다시 공유하기로 했다.

두번째로 물어본, 감정이입 면에서 나보다 좀더 성숙한 프랑스 친구 멜라니는 내 난감함을 이해해 주면서, 다시 나한테 학점 이수를 못한 1학년 학생의 충격과 실망을 이해해 주라면서, 만나서 시험지 보여주면서 하나씩 설명해 주란다. 그러고 나서 학생이 납득 못하면, 역시 학년 주임교수 지도편달 받아서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수밖에...

다른 학교나 다른 과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교육과정에 대해 학기당 2회씩 교수-교직원-학생 연석회의가 열리는 좌파 대학, 좌파 학과의 대응방식은 20여 년 전 한국에서 대학을 나온 내 사고방식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이런 건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나도 아까 메일 받았을 때는 논문 집중 깨지니까 머리도 아프고, 또 그 학생이 워낙 결석도 많이 하고, 공부는 제대로 안 하면서, 학점은 꼭 받아야 한다고 떵떵거리는 스타일이라... 또 이렇게 뻔뻔하게 메일까지 보냈구나, 하고 귀찮은 마음이 먼저 들었지만, 밤에 다시 생각해 보니...

적어도 어느 정도 설명은 들어야, 학년 말에 있는 과락자 부활 시험이라도 제대로 볼 게 아닌가 싶다. 저녁 먹고 나서, 채점기준에 대한 설명 듣고 싶으면, 이번 주 금요일에 만나자고 답장은 했다. 아휴, 학생이 납득하는 선에서 끝나면 좋겠다.

40명 수업(예전에는 25명이었다 한다)이고, 이 인원을 내 성에 찰 정도로 퀄리티 있는 강의를 제공하려면 일주일에 3~4일은 강의 준비며, 채점에 매달릴 텐데 논문 때문에 그럴 수는 없고... 그래도 졸고 떠드는 학생들 얼르고 달래며 이론보다는 읽고 쓰는 방법론 가르치면서 끌고 와서... 기말과제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제법 그럴싸 하게 내서, 고생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끝이 좋으니까 다 좋지 뭐 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일이었다. 뭐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이렇게 해서 또 배우는 거지 뭐. 하여간 이렇게 난감한 상황에 같이 고민해 주는 동료-친구들이 있어서 감사한 일이고, 또 학과에 물어볼 체계가 있어서 그것도 감사한 일이다. 에이쿠, 참 어렵다.


posted by amieda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