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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1.16 달려라, 일라리아.
2012. 11. 16. 23:50 우정의 한때
지난 10월 29일 리옹 데시트르 서점 벨쿠르점에서 "한국 소설가들과의 만남"이란 행사가 열렸다. 참여 작가는 편혜영, 김애란, 김중혁 작가. 관심은 김중혁 작가에게 있어서, 전에 H출판에서 함께 일한 postrain 선배의 이름을 팔아 인사를 건넸지만, 문학을 전공하는 이탈리아 친구 일라리아에겐 상대적으로 보편적인 내용의 김중혁 작가의 <악기들의 도서관>보다는 한국의 가족문화에 대해 알려줄 법한 <달려라 아비> 불어판을 소개하고 싶어서, 한 권 사서 김애란 작가의 친필사인까지 받아놨다.

책 사고 다음날, 집에서 지난 달 내 생일에 중국 친구 지아웨이가 검정색 레이스에 분홍 장미가 새겨진 스타킹을 선물해준, 알록달록 연두색 포장지 챙겨둔 것을 꺼내서 포장도 하고, 옛날옛적 회사 마케팅부장님이 캐나다 친척집에 다녀올 때 사오신 단풍나무 무늬 카드도 꺼내서, 나름 의미 깊은 카드도 한 장 썼다. 만성절 휴가 직전에 일라라이와 프랑수아 오종의 신작 영화 <집안에서>를 함께 봤는데, 영화 끝나고 시간이 늦기도 했지만, 일라리아는 늘 우리의 프랑스어 실력이 의미 깊은 얘기를 나누기에는 부족해서, 늘 안타깝다는 얘기를 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것이 우리의 어학실력보다는, 어떻게든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상상력과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얻을 만한 시간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 편에서는 수줍음이 원인이기도 하고, 일라리아가 얼마나 이상주의자이고 또 본인에게 엄격한 노력주의자인 줄 알기 때문에, 그러한 완벽주의를 그녀가 얼마간은 내려놓았으면... 하는 마음과, 살다 보면 저절로 그렇게 무르익을 터인데, 그런 말을 지금 굳이 할 필요는 없겠다, 우리는 어쨌든 많은 노력을 해서 외국 생활을 꾸려가야 하는 상황이니까... 그런 생각들 때문에 주저함이 더 많기도 하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카드에 썼다. 산다는 것은 상상하는 거니까,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이 소설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를 좀더 이해하고 더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만성절(11월 1일) 휴가 기간이라 일라리아는 이탈리아의 본가에 가 있었고, 행사 당일 나는 리옹의 모 어학원에 한국어 강사를 지원하려고 이력서를 내러 갔다가, 좀 위축된 상황이라 불어를 버벅거리고 찜찜한 기분에 깜깜한 계단을 불도 안 켜고 내려오다가 넘어져서 발목을 접질러서, 한동안 외출을 삼간 터라, 바로 전달하진 못하고 보름이 지났다.

오늘 드디어 깜짝선물하려고 일라리아가 아침마다 들르는 카톨릭대 도서관을 들러 만났다.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생활하고 공부하느라 늘 허리띠를 졸라매는 일라리아인지라, 불어로 읽을 수 있는 책 선물에 기뻐했다. 9월에 낸 박사과정 지원서류를 파리8대학 입학처에서 분실해서, 1년간의 노력이 물거품 될 위기라고. 급하게 서류를 다시 내긴 했지만, 너무 늦어져서 지원 사실 자체가 무산될지도 모른단다. 대부분의 대학 전형 지원시기가 지난 지금, 아니 이 무슨 날벼락인가 말인가. 이런 황당한 일이 일어나다니... 그녀의 분노와 낙담이라니... 속상하다.

워낙 옵티미스트라, 혼자 일년 더 공부하면서 내년에 리옹에 있는 대학들에, 본인에게 관심을 보일 교수가 있다면 다시 내겠다고는 하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많이 속상한가 보다. 빈정 상해서 내년엔 다른 학교에 낸다고 한다. 그래도 올해 무사히 합격하고 이 일은 그저 짧은 에피소드로 남기를 빌어본다.

흠, 나에게 만약 이런 일이 생겼다면... 헉, 귀국밖엔 방법 없었겠다. 일라리아는 리옹에 보수는 적지만 정규직인 직장도 있고, 유럽인이라 체류증 문제도 없지만... 나는 상황이 너무 복잡해지고, 더 이상 기다리고 어쩌고 할 틈이 없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얻은 기회가 참, 누구에게나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공부하는 습관도 안 잡히고, 장학금이든 아르바이트이든 체류자금 문제도 해결 된 게 아니라서, 공부에 완벽하게 마음을 잡지도 못했지만... 시간 헛되게 보내면 안 되겠다. 아무튼 <달려라 아비> 읽고 일라리아가 힘내서 또 열심히 달릴 수 있길.
posted by amieda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