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27. 21:37 삶의 한때

봉준호 감독이 신작 영화 <기생충>으로 2019년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일단 상을 받자, 한국의 언론이나 문화계 인사들이 봉준호 감독이 소설가 손자, 그래픽 디자이너 아들, 영문학자 동생 등으로 엄친아/천재로 형상화되는 유전자주의를 환기하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 나는 그보다는 그가 넷플릭스가 제작, 배급한 영화 <옥자> 연출 경험을 통해 어떤 글로벌 감각을 얻었고, 그것이 다시 한국 출신의 글로벌 영화제작사인 CJ 스태프들과 어떤 협력관계를 구축해서 <기생충> 제작과 연출에 다시 투입되었을지, 달리 말해, 봉준호라는 영화감독의 글로벌 문화자본, 사회자본 활용을 사회학적으로 어떻게 재현해서 분석할 수 있을지, 그런 게 궁금하다. 출판사 다닐 때도 편집자 병이 있었지만, 사회학자로서 사회적/지리적 모빌리티와 문화자본 사이의 동학을 질문하는 논문 틀을 준비하다 보니, 거의 저절로 품게 되는 질문이다. 

구조와 제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회학자로서 나는, 봉테일 씨가 90년대 초반 연대 사회학과와 90년대 후반 한국 영화아카데미에선 뭘 배웠고, 그의 가치들이 한국 사회를 어떻게 재현하고, 또 편집해 왔는가 하는 영상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이 던질 법한 질문 이상으로, 그게 감독 개인의 역량 확장일 뿐 아니라, 한국 사회구조 안에서, 또 영화산업 구조 안에서 한 영화감독이 어떻게 성장하고 진화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성공을 바탕으로 글로벌 온라인 영화 <옥자>를 연출하면서 다국적 배우/스탭/제작자들과 함께 글로벌 대중을 대상으로 이미지와 감정을 소통하는 방법으로서의 문화자본, 사회자본을 획득하면서 또한 자신이 쌓아온 한국적 컨텐츠들을 글로벌 컨텐츠로 변환시키는 전략들을 세우게 되었는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들으면 상당히 재밌을 것 같다. (물론 이러한 내가 이런 내용들을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특히나 올해는 내 전공을 충실히 공부해서, 논문을 마치기로 결심했기에 더 그렇다.)

그와 별개로, 봉준호 감독이 선보이는 꼼꼼하면서도 강력한 이미지들의 변태스러움을 대단하다 생각하지만, 사실 개인적으로 많이 좋아하지는 않는다... 시각적으로 너무 강한 이미지들은 나를 심란하게 만들어서, 자주 가까이 하고 싶지는 않다. 꼭 그런 이미지들을 영화로 찾아서 안 봐도 내 꿈에 자주, 생생하게 나온다. 독특한 이야기들을 이미지보다 텍스트와 구술로 접하는 게 내 내면의 평화을 지키는 데는 좋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 이후 봉준호 영화를 찾지 않은 이유가 그것인데, 그래도 <기생충>은 이례적으로 한 번 보러 갈 것 같다. 다음 주에 개봉한다니까, 하루 이틀쯤 심란해도 괜찮겠지 뭐.

영화 <기생충>의 황금종려상 수상에는 한->영 번역을 한국에 오래 산 미국인 영화평론가 달시 파켓 씨가 했다는 사실도 한몫 한 듯싶다. 한국 문화도 잘 알고, 한국어의 뉘앙스를 섬세하게 살려 영어 의역을 했다고 한다. (관련기사) 황금종려상 수상소식에 우리 합창단 분들도 영화 보러 가겠다고 나한테 한마디씩 하던데, 불어 번역은 누가, 어떻게 하려나? 영어 대본을 불어로 옮길까? 한국어 대본을 불어로 바꾸려나? 하는 호기심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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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5. 23. 20:09 삶의 한때

3월초에 호신술 수업 중에 무릎을 살짝 다쳐서, 그 이후로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 18년 전에 다친 발목이며, 16년 전에 다친 후로 계속 취약하던 발목이며 무릎이며 강화훈련도 하고, 책상물림 때문에 고질적으로 뭉친 엉덩이 근육을 풀어주는 스트레칭도 집에서 짬날 때마다 하면서 꽤 좋아졌다. 
하지만, 2001년 스키 사고 이후, 힘이 많이 들어가는 동작을 지탱하지 못하는 오른쪽 무릎의 상태는 여전히 모른다. 왼발을 들고, 오른발로만 선 채 무릎을 구부리면 지탱을 못해서, 무릎이 앞으로 내려가질 않고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진다. 통증을 피하기 위해, 뇌가 만들어낸 꼼수인데 그 오랜 세월 모르고 산 것이다. 
3월 중순에 찍은 X선 사진으로 봐서 뼈에는 문제가 없지만, 무릎 인대 부근에 작은 물주머니는 사라지지 않아 의사가 MRI를 찍어보자고 했다. 리옹에 MRI 장비를 갖춘 데가 많지 않아서, 의료영상센터 몇 군데에 전화를 해보았다. 처음 전화를 한 두어 군데는 전화를 안 받아 실패, 온라인으로 3월에 X레이 찍은 센터(방사선 기사가 불친절해서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에 예약을 잡은 후, 다시 전화를 걸어 사실 방사선 촬영이 아니라 MRI 예약으로 바꿔달라고 했더니, 자기네는 MRI가 없다고 한다... 다시 전화와 인터넷으로 빙빙 돌자니 스트레스를 받아서, 오늘 아침에 집 근처 종합병원에 직접 가서 예약을 잡았다. 6월 24일로 예약이 잡혔다. 
상태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무튼 물리치료는 받고 있으니까 낫고 있기는 할 것이다... 달리 수가 없으니까, 의사와 물리치료사가 하라는 대로, 18년 전에 다친 무릎과 발목 강화운동을 하고 있다만, 이 느리고 비효율적인 병원 분업체계를 견디면서 사는 프랑스인들의 이 멘털리티는 아직도 이해는 안 된다... 그걸 내가 이해할 의무는 없지만 말이다. 뭐,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아무튼 나는 낫고 있는 것이다. 발목과 무릎을 강화하면, 아마 인생의 태도도 좀더 꼿꼿해지지 않을까... 뭐 그런 정신력 강화 효과에 대한 기대도 품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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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 29. 21:13 삶의 한때

우리 합창단 총무부장(50대 후반 여자분, 프랑스 우체국 직원)이 합창단 일처리 두루두루 깔끔하게 잘 하고, 목소리도 좋고, 나한테도 엄청 친절하고, 내가 예쁜 옷이나 악세사리 걸치고 가면 항상 칭찬해 주고... 공평하고 좋은 사람이고자 하는 천칭자리인데, 단점이 나를 가끔 애 취급하면서 내 취향들을 뭉개 버린다. 아니 내가 합창단에서 명랑하게 지내고, 두번째로 젊은 합창단원이고, 가입한 지 이제 2년차이고, 본인보다 15년 정도 어리다고 해도, 엄연히 마흔 넘은 어른인데... 이건 뭐 텃세도 아니고... "넌 외국인이고 합창단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니 잘 모르겠지" 하는 '프랑스 플레이닝'의 연속 시전.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친해질 수는 없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합창단 공연 쉬는 시간에 케이크 판매를 하는데, 작년에 내가 '요즘엔 채식자들도 많으니 나는 비건 케이크를 굽겠다.' 라고 하니까 "관둬, 쓸데 없이 그런 걸 뭐하러 하니."라고 했던 일이 있다. 케이크는 일단 버터와 설탕 들어가야 맛있다는 대중적 취향의 보유자인가 보다 하고 한번 넘어갔다. 나는 내가 구워 가고 싶은 대로, 한식과 양식을 접합시킨 LA식 찹쌀 타르트를 구워갔다. 나한테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이후에 다른 케이크 얘기할 때 보면, 대략 불만족... 그냥 평범한 거(프랑스식) 해오라는 얘기다. 하지만 프랑스 사람도 아닌 내가 프랑스식 음식을 준비해 갈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녹두전도 부치고, 김밥이나 주먹밥도 싸고, 내 속에 편하고, 또 마늘과 양파를 먹지 않는 친한 합창단원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계속 만들어 갔다. 
며칠 전에는 내일 합창단 공연 끝나고 이어지는 뒷풀이에, 합창단 공금으론 말린 소시지와 치즈, 빵 등을 내놓을 테니... 각자 그 밖에 먹을 만한 음식들을 조금씩 싸오라고 공지를 했다. 같이 공연하는 관현악단 사람들도 같이 먹고, 구순 넘으신 명예 지휘자와 지금 합창단을 이끄는 지휘자 생일도 이맘 때이니 조금 거하게 뒷풀이를 할 예정이다. 야채를 좋아하는 나는 그럼 샐러드를 가져가겠다고 하니까, 자세히 들어보지도 않고 그런 건 됐어, 이런 식이다. 옆에 다른 사람이 "샐러드는 포크 필요해서 준비하기 복잡해." 하고 설명은 해줘서 납득하고 넘어갔지만, 이 총무부장의 태도에는 본인의 책임감과 열정이 앞선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감각을 살짝 잊어버린 감이 있다. 이분이 워낙 열심히 하고 또 잘하니까 합창단 다른 분들도 웬만한 건 맡기는 게 편하니까 다른 추가 의견을 잘 안 내는 편이기도 하다. 이러다 보니, 내 생각에 이 냥반은 합창단을 위한다는 생각과 본인 생각의 구분이 좀 흐려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것들보다 더 심각한 건, 연습시간에 자꾸 내 집중을 깨는 문제다. 나는 지휘자 지도 받으면서 다 같이 목 풀 때, 내 목소리와 접속하느라고 몸을 많이 움직이는 편이다. 1월 말에 다른 합창단이랑 합동공연할 때 "혹시 네가 허락한다면, 네가 공연할 때 움직이지 않다록 신호를 줘도 되겠니?" 하고 물어보길래, 한번 허용을 했다. 그런데 그 공연에서 특정 노래가 좀 어렵고, 공연 전에 연습량도 부족해서 다들 같이 틀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내가 혼자라도 다시 박자를 잡느라고 무릎을 까딱까딱 하는데 움직이지 말라고 내 팔을 잡았다. 미리 그래도 된다고 하기는 했지만, 막상 그 상황을 겪어보니 내가 집중이 깨져서 그 다음에 노래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이런 개입을 하지 말라고 해야지 생각을 하는데, 공연 앞두고 연습 강도가 높아서 연습날 진지하게 따로 얘기할 짬은 없고, 이 양반은 아예 내 습관을 고치려고 결심을 했는지, 잔소리 습관을 들여서 연습 중간에 계속 지적을 한다. 연습시간에 감정이 상한 채 얘기하면 나도 상당히 까칠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 상황을 피해 보려고, 옆자리에 앉지 않고 자리를 바꿔보기도 하고, 하는데 꼭 내 옆자리를 골라 앉았다. 이 냥반이 요즘 30년 같이 산 남편과 협의이혼 수속 중인 데다가 실업자 남동생이 몇 달째 집에 와서 구직도 안 하고 히키코모리 생활을 해서 속상하던 참이라는 말도 들어서, 웬만하면 넘어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사실 내가 첫째 줄에선 가장 안정적으로 노래를 하니까 내 옆에 앉는 걸 선호하는 게다. 그러면서 본인이 틀릴 때마다 '아 이번에 나 틀렸지?' 하면서 연습시간 중간에 계속 물어본다... 난 지휘 따라가면서 내 노래하기도 바쁜데 계속 이런 질문을 들으면 나도 참 할 말이 없다. 나는 타고난 목소리가 커서, 혼자 노래를 하면 편할 텐데, 합창단에서 노래를 하려니, 내 목소리만 너무 튀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제대로 노래하려니 마음이 혼자서도 이미 바쁘다 말이다. 그런데 이 양반은 자기 틀릴까 봐 걱정하면서 그 사이에 내 동작 관찰해서 잔소리를 한다. 
나를 관찰하고 잔소리할 에너지를 본인 내면으로 돌리면, 나를 따라하지 않아도 본인 스스로 음정, 박자를 잘 잡을 수 있을 텐데... 그런 불만을 키워가면서 두 달여가 지났다. 이번 주에도 어김 없이 옆자리, 어김없이 또 한마디. "여긴 집회가 아니야." 작년 가을 마크롱 반대 집회에서 우연히 만났을 땐 그리 반가워하더니, 그 좋은 기억까지 잔소리에 써먹나...? 매번 무안하고 당황스러웠다.

이번 주 연습이 끝나고 집에 와서도 계속 생각이 나고, 계속 이러면 내가 연습시간에 행복할 수가 없구나, 그러면 논문 쓰는 데도 방해가 된다, 선을 긋는 게 필요하겠구나 싶어서 드디어 메일을 썼다. 내가 연습시간에 몸을 움직이는 거 얘기 그만하라고 썼다. 주로 움직이는 건 나하고 접속해서 노래에 맞춘 감정을 잡거나, 어떻게 소리를 보내고 울릴지 감을 잡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작업이다 하고 우선 설명을 했다.
그리고 내가 공연 때 움직일까 봐 걱정하는 건 당신이지, 난 아니다. 난 내가 뭘 노래해야 할지도 알고, 내 목소리가 어디까지 올라갈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정확하게 안다, 나는 똑똑하고 용감한 여성이고, 이 행성 위에서 수십 년간 내 나름의 경험을 쌓은 사람이다, 나는 나를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썼다. 
그리고 합창 공연에 노래 들으러 왔으면, 합창단 전체의 화음을 듣고, 좋은 소리를 내려고 하는 단원들의 열정을 봐야지, 일개 합창단원이 몸 조금 더 움직였다고 그걸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공연을 보러 올 자격이 안 된다고 썼다. 

처음에는 살짝 삐진 듯, 그럼 네 옆에 앉지 않겠다고 건조하게 한줄짜리 답장을 했다. 답장 온 건 알았지만, 내가 논문에 집중하려고 읽지 않고 답장을 안 니까, 몇 시간 후에 다시 메일이 왔다. 내가 집중하는 데 그런 동작이 필요하다면 연습시간에는 신경을 안 쓰겠다고, 공연에서만 안 하면 된다고... (내 마음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은 끝까지 안 썼다. 역시 나와 친해기지는 힘든 사람이다. 진짜 사려 깊은 사람이거나 나에게 개인적인 관심이 있었다면, 합창단에 대한 열정이 앞서서 그랬다고, 내 기분 어쩔지 생각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썼겠지...) 

어쨌든 더 이상 잔소리 안 하겠다고 했으니, 나도 그 사이에 마음이 조금 가벼워져서, 이해해 줘서 무척 고맙다, 공연 때는 안 할 테니 걱정 말아라. 당신은 섬세한 사람이 있으니 내가 얘기하면 들어줄 거라고 믿고 메일을 쓴 거다... 하고 내 나름대로는 외교적 뒷마무리. 

합창단은 내가 논문 바깥에서 잠깐씩 행복하게 지내러 가는 곳인데, 여기서 프랑스 플레인인지, 텃세인지 내 선을 자꾸 건드리니... 결국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어떤 성깔이 있는 사람인지 또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내일 공연 판매용 케이크는 달걀은 들어가지만, 버터와 밀가루 없이 가볍고 담백한 케이크, 뒤풀이용 음식으론 채소스틱과 채식 치즈맛 디핑소스를 만들어 가기로 결심했다. 

논문을 통해 내가 무엇에 관심을 갖고 질문하고, 무엇에 가치를 두는지 설명해야 하는데, 불어로 나를 그렇게 표현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 불어만의 문제가 아니고, 압도적인 사회학의 연구전통 앞에서 외국인이고 여성이라는, 그들이 나에게 씌우는 재현에 갖히지 않고, 한국사회에 프랑스적인 연구질문을 가져와서 적용을 시키든, 혹은 프랑스 도시사회학 안에 서울이라는 새로운 필드를 꺾꽂이해서 뿌리 내리게 하든... 모두 나라는 개인이 튼튼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는 도전이다. 그리하여 일상에서도 나를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프랑스 사람들이 나를 더 존중하도록 에너지를 쓴다. 이 새로운 실천들이 좋은 습관이 되어 글쓰기할 때도 자연스러운 자신감으로 나타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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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 24. 00:39 삶의 한때
오늘은 장터에서 정어리를 샀다. 정어리가 살이 오르는 철이다. 김치에 지져 먹을까 했는데, 야채장수가 납작 파슬리를 공짜로 듬뿍 주는 바람에 파슬리를 쓰려고... 담백하게 지리로 끓였다. 무와 다시마를 넣고 끓이던 육수에 정어리와 쪽파, 생강, 마늘, 소금을 넣어 익혔다. 불을 끄고 미나리 대신 파슬리를 올려 잠깐 뚜껑을 덮었다가 밥과 김치에 곁들여 먹었다. 담백하고 순하고 싱싱한 맛이었다.

생선장수에게 정어리 500그램 달라고 했는데, 생선장수가 (1유로어치라도 더 팔려고 그랬는지) 650그램을 담아 놓고 쬐금~ 넘어갔다고 우겼다. 도로 덜어내라고 할까 하다가, 들고 있는 짐, 즉 먼저 산 과일과 야채가 무거워 말 길게 하기 귀찮아서 그냥 담아준 채로 받아왔다. 집에 와서 봉지를 열어보니 여남은 마리다.
손으로 문질러 비닐을 벗겨내고 찬물에 한 마리씩 헹궈, 여덟 마리는 정어리 지리를 끓이고, 다섯 마리는 굵은 소금을 넉넉히 뿌려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정어리에 간이 들고, 밤에 기온이 떨어지면 창 밖에 내놓아 조금 꾸덕하게 말려서 얼릴까 싶다. 한 마리씩 구워서 밥 반찬으로 먹어야지. 매일 먹지는 않을 테니, 다 먹으려면 보름 넘게 걸리겠다.

정어리 조림 대신 (들어본 적도 없는) 정어리 지리를 만드는 일. 살아온 문화의 습관에서 벗어나는 일, 몸에 익혀온 입맛을 바꾸는 일을 할 때마다 마음에 작은 저항이 이는데, 새로운 도전을 하는 쪽으로 잘 넘어가곤 한다. 그러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헷갈릴 때는 한국에서 먹던 음식이나 부르던 노래들을 다시 찾는다. 여전히 좋은 것도 있고, 이제는 맞지 않는 것도 있다. 그렇게 내가 어떤 사람으로 남았는지/변했는지 가끔 확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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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 12. 06:23 삶의 한때

지난 주에 호신술 수업에서 무릎을 약간 다쳐서 오늘 스포츠의학과에 다녀왔다. 친절하고 젊은 의사가 무릎 부상은 경미한 정도라 2주 정도면 아물 것 같다고 한다. 그 사이에 호신술은 가지 말고, 자전거는 기어 풀어놓고 타고, 수영이나 살살 하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의사가 여기저기 검사를 하다가 골반과 엉덩이 근육 뭉친 게 더 심하다며, 나한테 등이 아프지 않냐고 물어봤다. 내가 다리가 좀 짧은데, 책상 높이에 맞춰서 의자 높이를 조정했더니 다리가 바닥에 제대로 안 닿아서 의자에 좀 불안정하게 앉는 습관이 있는데, 이게 골반과 이상근에 참 안 좋았나 보다. 치료는 골반이 받아야겠다고, 물리치료 받으면서 천천히 해결해 보자고 한다.

무릎 상태도 보면, 이번에 다친 건 큰일이 아닌데, 18년 전에 스키 사고로 다친 후유증이 더 심하고, 6년 전에 심하게 접지른 발목도 당시에 프랑스 의료보험 가입할 줄 몰라서, 집에서 수지침과 족욕으로 자가치료하고 한 달 동안 집밖에 안 나갔다가 한국 갈 때마다 침만 맞았는데 완치는 안 되고 발목이 종종 뻐근하다. 7년 전에 다친 데가 아직도 종종 염증이 생기는 걸 보면 발목 안쪽 연골이 상해서, 안쪽 복숭아뼈 근육을 쓰니까 그쪽이 뻐근한 염증이 자꾸 생기는 것 같단다. 노년에 (정확히 무슨 단어인지는 못 알아들었지만) 발목 못 쓰는 일이 남들보다 빨리 시작될지도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치료를 해보자고. 완치는 못해도 그 현상이 오는 걸 조금 늦출 수만 있다고 한다. 일단 엑스레이 찍어보자고 했다.


아 내가 이런 것들을 혼자 끌어앉고 이국만리에 살고 있구나, 그래서 그렇게 쉽게 피곤해졌구나 하는 제대로 된 이해와 함께 이제라도 프랑스 사회보장제도 혜택 받아 살살 치료하면, 논문 쓰는 동안 조금 덜 아프겠네....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내가 생각해도 내가 좀 짠하다. 아무튼 차분하고 설명 잘하는 의사 만나니까 안심이 되긴 한다.


다들 아프지 마시고, 작은 아픔이라고 무시하지 마시고, 오래된 병도 완치는 못해도 치료하면 조금이라도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작은 증상도 짬짬히 확인하며 고치고 살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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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 9. 04:18 삶의 한때

오늘 연구소에서 박사생 동기 겸 친구랑 점심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친구가 내 말투 가지고 잠깐 얘기를 했다. 
내 말투라는 게 끝까지 들어보지 않으면 절대 논점을 파악하기 힘들 발화구조인데, 이건 불어가 문제가 아니라, 말하면서 생각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지라, 나도 내가 정확히 어떤 얘기를 할지 다 생각하고 말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불어로 생각해서 말하려니 머리는 더 바쁘다. 그러니 미리 내가 무슨 얘기하는지 정확히 포인트를 알려주기가 힘들다.

발화 코드가 정해져 있는 학술 담화나 논문 쓸 때는 당연히 좀더 주의를 해야 하고, 고칠 필요가 있는 습관이니까, 친구가 어떤 어떤 식으로 고쳐 보라고 제안하는 얘기를 덤덤한 얼굴로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별로 신경쓰지 않지만, 가끔 지도교수와 논문 관련해서 소통할 때 자꾸 갭이 생기는 부분을 해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친구도 말하기 미안해 하면서도, 내가 덤덤한 얼굴로 들으니까... 내가 외국인 억양도 있는 데다가 말하는 방식도 낯서니, 남들이 안 듣게 되고... 자기가 보다가 열받는 일이 여러 번이었다는 거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걸 바꿀 수 있을까 혼자 고민을 했나 보다. 말하기 전에 상대가 한 얘기랑 내가 앞으로 하려는 얘기랑 뭔가 연결이 될 거 같다고, 그 말 한마디만이라도 해서 주의를 끌라고 말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그렇게 하긴 하는데, 사실 나는 들으면 지루하다. 한국인이라 그런지, 내 인지구조 탓인지 모르겠지만, 쓸 데 없는 군말이랄까. 어쨌든 8년 동안 못 배운 걸 보면, 나랑 잘 맞지는 않는 듯. 물론 발표/강의/논문에는 적용하려고 신경을 쓰지만 말이다.

암튼 친구가 얘기를 꺼낸 것도 좋은 의도에서고, 나도 "그래, 너랑 있을 때 조금 더 연습을 해볼께. 너도 도와주렴."이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마음을 안 다치기는 어렵다. 별로 안 친한 사람한테 그런 얘기를 들어도 소화 시키고 흘려보내는 데 이삼 일 걸리는데, 제일 친한 박사생 동기가 그랬으니... 속이 꽤 많이 상한다.

친구도 집에서 큰딸인지라 보호자 스타일인지도 알겠고, 자기 자신에게도 깐깐한 편인지라, 친한 친구인 내가 남들한테, (자기 생각에는) 있는 실력만큼 인정 못 받는 것도 안타깝겠지. 30대 초반이라 커리어/사회적 인정 문제에 훨씬 더 민감하기도 할 테고... 나도 30대 초반엔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남들이 청하지 않아도 충고도 많이 했다. 그게 또 그 나이 때의 열정이고, 우정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친구가 자학할 때 긍정적인 얘기하는 거 빼면, "너는 이게 문제다" 하는 법이 없고, '자기 생긴 대로 감당하고 살겠지. 자기가 정말 필요하다고 느끼면 나중에 고치겠지' 하고 마는 편이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우정이고, 또 애정이라고 믿는다. 때로는 적용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이 친구도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후... "남들 눈엔 네가 제대로 안 보인다"라는 걸로 나를 고치려 들다니, 뜻밖의 한방이었다.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는가 보다는, 내가 나 자신에게 충실하고 그 속에서 나를 발전시켜 가는 게 어쨌든 나에게는 더 중요한데 말이다... 그게 40대의 힘 아니겠나. 아까 그 얘기는 했어야 하는데, 그게 좀 아쉽다. 다음에 그녀가 비슷한 시도를 하면, 그때는 제대로 방어해야지.

친구가 요즘 논문 때문에 예민해져서 완벽주의가 심해져서 주변에 완벽하지 못할 걸 더 못 참는 것 같다.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아프고 속상하고 그렇다. 내 말에 정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억양이 안 좋든, 말하는 구조가 산만하든, 어쨌든 듣기 마련이고, 나도 그런 사람들을 내 친구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거기서 약간 에고가 나오면서 화가 나려고 하는데, 여기다가 조금 늘어놓는 걸로 한 시름 놓으려고 한다. 주말에 명상 또 많이 해야지...

써 놓고 보니, 역시 이 글도 나의 구어체 발화구조와 별로 다르지 않구나. 마음 아픈 걸 조금 내려놓으려고 두서 없이 쓴 글이니... 하는 수 없지...


posted by amiedame
2019. 3. 5. 06:17 삶의 한때
강의 3년차 만에 왜 남들은 다 성적 잘 주고 자기만 성적을 제대로 안 줬냐는 메일을 받았다. 시험도 보고, 과제도 다 냈는데 왜 과락을 시켰냐는 거다. 20점 만점에 3.9점이니까 10점을 넘겨야 하는 이수 점수에도 한참 모자란다.

중간고사는 망한 건 자기도 알 테고, 수업태도 성실하지 못했고(수업태도 점수 2점 획득 못함), 쪽지과제는 제대로 냈지만, 기말고사 대신 내라고 한 보고서에는 지정된 텍스트 외에 다른 텍스트를 요약해서 냈기에 제출점수로 10% 점수만 줬다.

그래 놓고, 남들은 다 점수 잘 줬는데, 자기 점수만 왜 이러냐고, 만나서 제대로 알려달라고, 성적 발표 2주 후에 연락이 왔다...? 이 친구 이름이 Merveille, 즉 경이로움인데, 자신감이 참 경이롭다.

"나는 원칙대로 처리했다고, 학생이 과제를 제대로 인지하지 않고 엉뚱한 걸 냈으니 학생 책임일세" 하고 무심하게 답장을 할까 하다가, 그래도 신중하자 싶어 친한 강사-박사생 친구 2명에게 물어봤다.

고교교사 경험 있는 브라질 친구(즉 학생은 학생, 선생은 선생이라는 구분에 좀더 익숙함) 페르난다는 우선 내가 아직 청소년 말기인 남자 학생과 둘이 만나는 건 좀 위험하지 않냐고 걱정을 했다. 자기도 작년에 맡은 강의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TA분반들 상위에 있는 대형강의 책임교수가 그러면 보충시험을 보게 해주라고 해서 그렇게 처리한 적이 있다고 답을 해줬다. 나는 그 학생만 과락 점수를 준 게 아닌데, 그 학생만 문제제기를 했다고 보충시험을 보게 되면, 형평성 문제가 생긴다. 역시 절차 부분에선 학년 책임교수에게 물어보는 게 낫다는 임시 결론. 하여간 나중에 어떻게 처리했는지, 서로 자체 '강사 교육' 차원에서 나중에 다시 공유하기로 했다.

두번째로 물어본, 감정이입 면에서 나보다 좀더 성숙한 프랑스 친구 멜라니는 내 난감함을 이해해 주면서, 다시 나한테 학점 이수를 못한 1학년 학생의 충격과 실망을 이해해 주라면서, 만나서 시험지 보여주면서 하나씩 설명해 주란다. 그러고 나서 학생이 납득 못하면, 역시 학년 주임교수 지도편달 받아서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수밖에...

다른 학교나 다른 과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교육과정에 대해 학기당 2회씩 교수-교직원-학생 연석회의가 열리는 좌파 대학, 좌파 학과의 대응방식은 20여 년 전 한국에서 대학을 나온 내 사고방식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이런 건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나도 아까 메일 받았을 때는 논문 집중 깨지니까 머리도 아프고, 또 그 학생이 워낙 결석도 많이 하고, 공부는 제대로 안 하면서, 학점은 꼭 받아야 한다고 떵떵거리는 스타일이라... 또 이렇게 뻔뻔하게 메일까지 보냈구나, 하고 귀찮은 마음이 먼저 들었지만, 밤에 다시 생각해 보니...

적어도 어느 정도 설명은 들어야, 학년 말에 있는 과락자 부활 시험이라도 제대로 볼 게 아닌가 싶다. 저녁 먹고 나서, 채점기준에 대한 설명 듣고 싶으면, 이번 주 금요일에 만나자고 답장은 했다. 아휴, 학생이 납득하는 선에서 끝나면 좋겠다.

40명 수업(예전에는 25명이었다 한다)이고, 이 인원을 내 성에 찰 정도로 퀄리티 있는 강의를 제공하려면 일주일에 3~4일은 강의 준비며, 채점에 매달릴 텐데 논문 때문에 그럴 수는 없고... 그래도 졸고 떠드는 학생들 얼르고 달래며 이론보다는 읽고 쓰는 방법론 가르치면서 끌고 와서... 기말과제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제법 그럴싸 하게 내서, 고생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끝이 좋으니까 다 좋지 뭐 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일이었다. 뭐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이렇게 해서 또 배우는 거지 뭐. 하여간 이렇게 난감한 상황에 같이 고민해 주는 동료-친구들이 있어서 감사한 일이고, 또 학과에 물어볼 체계가 있어서 그것도 감사한 일이다. 에이쿠, 참 어렵다.


posted by amiedame
2019. 1. 7. 17:12 삶의 한때

편집자라는 진로를 결정할 때는, 책을 좋아해서라는 이유도 있지만, 남을 도와주기 좋아해서라는 성격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근 10년쯤 계속하니 남을 도와주기만 하는 직업은 나한테 남는 게 없는 느낌이 너무 오래 계속되었다. 물론 편집자란 직업 자체가 그렇진 않다. 편집자로서의 전문성도 있고, 분야의 전문성도 있다. 다만 조직 내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자기 전문성을 키우기가 점차 어려워지는 출판노동 조건에서 나도 뭔가 내 것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러면 보통 자기 걸 쌓고 싶은 편집자들은 창업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이런저런 사연이 엮여 박사논문을 준비하게 되었다. 

어학과정 밟고 논문 준비하는 지난 8년간 앞으로 뭐가 될지 고민도 많이 했지만, 아직 분명하지만은 않다. 가능성들을 따라 한발 한발 옮길 뿐이다. 다만 타고난 성격을 바꿀 수는 없는지라, 내 것만 챙기는 건 못할 것 같다. 조금 업그레이드해서, '남이 스스로 잘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뭔가 하고 싶다. 그래서 내 강의는 내가 가르치는 것보단 내가 학생들에게 "여러분의 본능과 직관을 믿으세요. 틀려도 상관 없어요. 같이 고치면 되니까." 하는 식의 연습문제를 주고, 나중에 결정적으로 틀린 걸 잡아주거나 잘한 걸 칭찬해 준다. 선생 역할의 매니저화랄까... 하여간, 앞으로 계속 이 방향으로 나가려면 내(초자아)가 나(자아)한테 일을 잘하도록 도와주는 경험을 쌓자. 이제는 내가 내 매니저고 선생님이다. (세상 전체가 학교라는 전제에서.)

posted by amied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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